작성자 : 구절암   |   열람수 : 863   |   작성일 : 18-09-27 19:21

미지의 외래 문화를 수용하면 수용하는 측의 알려진 틀에 따라 진행된다. 일본이 프랑스를 수용 할 때의 프레임 워크로는 일본 고유의 하나님이 있었다. 「일본 서기」는 긴 메이 천황이 불상 예배 여부에 대해 군신에게 물었을 때, 소 가노이나 메는 西蕃의 국가들이 모두 예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만은 거역 할 수는 없다 고 답했다 . 이에 대해 物部 부흥과 中臣鎌子은 이에 반대하고 일본의 천황은 텐진 치기를 祭拝하고 왔는데 그만 蕃神을 볼수하면 나라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. 이 같은 일본 전통의 나라 하나님에 대한 외국의 蕃神 발상이 불교를 파악하는 출발점이었다. 참고로 중국의 경우는 황제와 노자의 이미지에서 부처님을 수용했다.

또한 56 두 년 일본과의 교류가 깊었던 임나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면 조정은 백제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하여 백제 오 1977 (비 다쓰 천황 여섯) 년에는 경론 약간 권 외에, 율사, 선사, 비구니, 저주 금 사나 구조 仏工 · 造寺 공을 헌상했다. 그리고 다섯 여덟 네 (이 열세) 년에는 시바 達等의 딸 (善信 비구니)이 처음으로 출가했다. 파견 된 승려가 남성 승려가 아니라 여성 (비구니)임을 일본 최초의 출가자도 여성 인 것이 주목된다. 즉,이 시점에서, 불교의 승려는 샤머니즘의 무녀처럼 생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. 이 밖에 신앙의 태도는 治病 장수 등 현세 이익 중심이며, 불교의 고급 이론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.

불교 공 전 ~ 15 400 년 남짓이 지났지 만 전래 초기에는 일본 고유의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파악 된 불교에 대한 인식은 오랜 역사 속에서 크게 달라진이라고도 말할 것이며 "하나님 도 부처도 '와 더불어 칭 해지는 것을 보면 의외로 지금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.